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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가장 가난한 곳에서 시작된 꿈
작성일
2021.09.13
조회수
723

마이클 리어던 조셉 신부(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 이사장)

 

수십 년 전만 해도 제주는 풍족하지 못한 곳이었다. 지금은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성이시돌목장 역시 마찬가지다. 밝고 경쾌한 옷차림으로 사진 찍기에 열중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이시돌목장은 한때 어느 곳보다 더 깊은 결핍과 곤궁이 가득했던 마을의 중심이었다.

 

돼지 한 마리로 시작된 제주의 역사

 

드넓은 초지에서 건강한 소와 말을 키우는 성이시돌목장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지난 1954년 4월. 한국 전쟁 직후, 대한민국이 가장 가난하던 때였다.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소속으로 제주에 온 아일랜드 출신의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 신부는 황무지를 목초지로 개간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신자를 모으고 복음을 전하는 게 사제의 첫 번째 임무였지만, 그는 주민들을 가난에서 구해내는 게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라 믿었다.

 

“임피제(1973년 명예도민증을 받은 맥그린치 신부의 한국이름) 신부님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지 많이 고민하셨습니다. 처음엔 양을 키웠어요. 양털로 옷을 만들려고요.”

 

임피제 신부를 이어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의 이사장이 된 마이클 리어던 신부는 이시돌 목장의 시작과 그동안 걸어온 길을 차분히 설명했다.

 

임피제 신부의 모국인 아일랜드는 대기근과 두 차례의 세계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당시 아일랜드 여성들이 만든 양털 스웨터가 해외로 수출되며 경제에 많은 보탬이 되었는데, 임피제 신부는 그 경험을 제주에서 되살리려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림수직은 제주 여성들에게 상당한 소득을 안겨주었다. 지난 2004년 대량 생산 제품 등에 밀려 문을 닫았지만, 한림수직이 생산한 제품은 품질이 워낙 좋아 한때 제주도민들의 필수 혼수 품목이었을 정도란다.

 

“당시에는 목장으로 오는 길이 하나밖에 없었어요. 길도 아주 험했고요. 날씨와 문화, 언어, 음식 같은 것들은 제 고향 아일랜드와는 전혀 달랐지만 비슷한 점도 있었습니다. 돌로 쌓은 담벼락과 언제나 세차게 부는 바람, 그리고 좋은 사람들…”

 

마이클 신부가 수의사로서 처음 제주를 찾았던 때는 목장의 주력 가축이 면양에서 돼지로 옮겨가던 때였다. 돼지는 넓지 않은 공간에서 최대의 효율을 담보할 수 있는 가축이었다. 처음에는 주민들에게 돼지를 나눠주기도 했지만, 생활고에 다 성장하지도 않은 돼지를 팔아버리는 일이 종종 생기자 결국 다시 돼지를 거두어들이고 주민들을 목장에서 일하도록 했다.

 

양돈사업은 그렇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해외에서 요크셔 품종을 들여와 품종개량을 거듭하고, 기생충과 육질 관리 등 노력이 동반되자 점점 제주 돼지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하지만 성이시돌목장도 1978~1979년 일어난 양돈 파동의 여파를 피하지는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마이클 신부는 아일랜드 귀향길에 올라야 했다. 처음 제주에 머물기로 약속했던 2년에서 6개월이 더 지난 시점이었다.

 

유기농으로 관리되는 성이시돌목장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

 

신부가 되어 돌아온 수의사

 

모든 게 낯설었던 제주에서 지낸 시간은 마이클 신부에게 잊지 못할 기억이 됐다. 결국 그는 임피제 신부가 그러했듯 사제가 되어 다시 제주를 찾았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도 물론 컸지만, 당시 저에게는 제주와 제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예수님과 하느님께는 죄송하지만요.”

 

푸근한 표정의 마이클 신부는 다시 제주에 도착했을 때의 심정을 “마치 고향 집에 돌아온 것 같이 기쁘고 편안했다”고 회상했다. 물론 다시 돌아온 제주에서 기쁜 일만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각종 시스템이 발전하며 성이시돌목장을 포함한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가 해야 할 일이 엄청나게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예전엔 누구나 와서 봉사활동을 할 수 있었어요. 누구나 우리에게 힘을 보탤 수 있었고요. 하지만 이제는 여러 규칙이 생기고 절차가 생겼습니다. 일정 자격을 가진 사람들만 참여할 수 있는 규정도 생겼어요.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죠.”

 

그래서 마이클 신부는 “도망가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임피제 신부의 후임으로서 그 많은 일을 관리하고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는 성이시돌목장뿐 아니라 이시돌피정의 집, 성이시돌복지의원, 청소년보호시설 숨비소리 등을 아우르고 있다. 대부분 성이시돌목장에서 발생하는 이익금으로 운영되고 있는 곳들이다.

 

“성이시돌목장에서 수익을 내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일정한 수익을 유지하기 위해 몇 차례 변화도 있었고요. 지금은 돼지가 아닌 비육우와 낙농, 경주마 등을 통해 수익을 올리고 있어요.”

 

성이시돌목장은 지난 2012년 전국적인 구제역 파동을 기점으로 양돈사업을 중단하고, 목장에서 키우던 돼지들은 함께 일하던 사람들에게 모두 분양했다.

 

“경영의 관점에서 보자면 실패한 선택일 수도 있어요. 돼지고기 수요는 여전히 높고 가격도 안정적이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처음 돼지를 키우려고 했던 때의 목적을 떠올리면 굉장한 성공을 한 셈입니다. 임피제 신부님은 이곳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제주에서 양돈을 시작했으니 말입니다.”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는 현재 비육우와 낙농, 경주마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생태와 환경이 살아 있는 목장을 꿈꾸다

 

“수익을 올리는 관점에서는 규모를 키우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크고 많은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확장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있는 것을 더 좋게, 더 오랫동안 보존하는 데에 관심이 많지요.”

 

성이시돌목장의 대표상품은 우유와 치즈를 비롯한 각종 낙농제품이다. 누구도 성공을 낙관하지 않았던 목초지는 수십 년째 유기농인 상태로 관리되고 있다. 이곳에서 자란 풀을 먹은 소는 건강한 우유를 생산한다. 이렇게 생산되는 고품질 우유는 전국의 많은 유가공업체에게 사랑받고 있다. 유제품으로 유명한 미스터밀크는 성이시돌목장의 우유를 더 원활하게 공급받고 더 신선한 상태로 가공하기 위해 제주도에 신설을 계획하고 있을 정도.

 

“저희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관광형 목장에 대한 고민이 없진 않았습니다. 수익을 올리는 측면에서는 분명히 도움이 되는 일이거든요.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방법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이클 신부는 목장을 친환경 생태 교육 현장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오랫동안 연구하고 협의해왔다. 성이시돌목장 안에서 순환하는 자연을 많은 사람이 직접 보고 관찰하며 배울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수익을 올리는 관점에서는 규모를 키우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크고 많은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확장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있는 것을 더 좋게, 더 오랫동안 보존하는 데에 관심이 많지요. 이런 일에 관심을 갖고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목장은 모두에게 열린 곳이니까요.”

 

축적이 아닌 순환을 꿈꾸는 곳, 그래서 더 많은 생명이 더 많은 이로움을 나누는 곳. 돼지 한 마리에서 시작한 나눔과 상생의 정신이 제주에서 조금씩 구체화하고 있다.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와 함께 말이다.